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몽골 제국 (문단 편집) === 점령 실패 사례 === * [[델리 술탄국]]: 인도의 [[노예 왕조]], [[할지 왕조]], [[투글루크 왕조]]도 분열제국인 차가타이 칸국의 공격을 받았으나 치열하게 싸운 끝에 견뎌냈다. 이 중 차가타이 칸국에 맞서 가장 격렬하게 싸운 국가는 할지 왕조이며 특히 2대 명군 알라웃딘 칼리지는 다섯 차례 침입을 막고 역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을 공격하는 등 훌륭한 성과를 보여주었다[[http://todayhumor.com/?humorbest_1674314|#]]. 그러나 이후 몽골의 후예를 자처한 [[티무르]]가 델리를 침략하면서 쇠퇴의 길을 걷게되며 그 티무르의 후손인 바부르가 델리 술탄국을 멸망시키고 무굴 제국이 들어선다. 다만 바부르 대에는 몽골의 정체성은 거의 없어진 상태. 오히려 바부르는 티무르의 정체성이 더 많았다고 봐야한다. * [[맘루크 왕조]]: [[바이바르스]]의 활약으로 중동으로 발을 뻗치던 몽골군을 격퇴했다. 바이바르스는 터키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있었던 [[일 칸국]]의 몽골군을 1277년 전투에서 패퇴시키고,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 사령관인 키트부가를 사살하는 성과를 거둔다.[* 물론 이듬해, [[알 무스탄시르 2세]]가 이끄는 맘루크 군이 [[바그다드]]를 침공했으나 역으로 몽골군에게 궤멸당하긴 했다.] 이에 키트부카의 상관인 훌라구가 화가 나서 자신이 직접 이집트를 쓸어버릴 계획을 가지고 전쟁 준비를 하다가 병에 걸려 죽는다. 이후 몽골군은 중동지역에 대한 약탈과 점령을 반복했지만, 끝내 맘루크 왕조를 복속시키지는 못했다[[https://cafe.daum.net/shogun/9xm/9336|#1]],[[https://cafe.daum.net/shogun/9xm/9337|#2]], [[https://cafe.daum.net/shogun/9xm/9339|#3]], [[https://cafe.daum.net/shogun/9xm/9340|#4]]. * [[베트남]] [[쩐 왕조]]: 1차 베트남 침공 시에는 정송가도를 내세워 3만의 군사로 침공, 수도인 탕롱까지 점령했지만 전염병으로 물러났다. 이후 쿠빌라이 칸 시기인 2차 침공에는 참파, 운남, 광둥 세 방향으로 공격했지만, [[쩐흥다오]]의 저항과 전염병 및 게릴라전으로 5만 명이 포로로 잡히며 패배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3차 침공까지 가하지만 바익당 강에서 또 패배했다.[* 베트남 북부의 산악지대가 몽골의 침공에 있어서 첫 번째 관문으로 작용했고, 간신히 북부 산악 지대를 뚫은 이후 나오는 저지대의 빽빽한 정글과 복잡하게 얽혀있는 하천들과 습지로 인해 몽골군 특유의 기동성을 살리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리고 서늘하고 비가 적게 내리는 몽골 및 북중국 지역과 상반된 베트남의 찌는듯한 열대 기후와 잦은 강우가 몽골군을 괴롭혔으며, 정글에 사는 해충과 맹수들 또한 몽골군을 괴롭혔다. 그리고 이런 자연환경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전염병이 몽골군을 휩쓸면서 상당한 전력 손실을 입었다. 이런 베트남의 혹독한 자연 환경에 치를 떨며 약해져 있던 몽골군을 정글 속을 날렵하게 오가며 살해하는 베트남군은 몽골군에게 있어 공포 그 자체였다. 훗날 명나라, 프랑스, 미국, 중국 모두 베트남에서 비슷한 경험을 거친 이후 결국 철수했고, 이 때문에 베트남에 제국의 무덤이라는 별명이 붙게 됐다.] 하지만 쿠빌라이 칸은 인도차이나 지역으로의 진출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고, 때문에 4차 침공을 계획했지만 쿠빌라이 칸이 사망하면서 추진력이 약화됐다. 이후 베트남에게서 명목상의 사대를 받고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침공은 백지화되었다. * [[보헤미아 왕국]]: 올로모츠 전투에서 몽골군을 패퇴시키며 국체를 보존할 수 있었다. * [[오스트리아]] 공국: 몽골은 헝가리를 침략하고 이후 비엔나 북쪽에 위치한 코르노이부르크에 소규모 군대를 보내면서 오스트리아도 침략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의 활약으로 전멸했다. * [[인도네시아]] [[싱하사리 왕국]]: 몽골군은 [[자바 섬]]도 침략했었는데, 당시 자바에는 싱하사리(Singhasari) 왕국이 있었다. 침공 이유는 당시 싱하사리 왕국의 왕 '크르타나가라(Kertanagara)'가 1289년에 원나라에서 보낸 사절의 조공 요구를 거부하고 사신의 코를 잘라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1292년에 자바로 원정을 왔더니 크르타나가라는 크디리(Kediri) 지역 유력자의 반란으로 이미 살해당한 뒤였고, 원 제국 군대는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몽골군이 목적을 상실하여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할 때 크르타나가라의 사위이자 후계자였던 라덴 위자야(Raden Wijaya)가 몽골군에게 접근해서 원나라 군대와 협력하여 자신의 장인이자 전임자를 살해한 크디리 지역의 반란군을 진압했다. 위자야는 현재의 수마트라 지역으로 원정나가 있던 군대가 다시 돌아오자 바로 원나라 군대를 공격해 패퇴시켰다. 반란군과 몽골군을 모두 무찌른 위자야는 훗날 인도네시아를 최초로 통합한 왕조로 여겨지는 [[마자파힛 제국]]의 시조가 됐다. * [[일본]] [[가마쿠라 막부]]: 원나라는 2번에 걸쳐 [[쓰시마]]를 통해 [[규슈]] [[하카타]]에 대군을 상륙시키며 일본을 침공했다. 이에 [[가마쿠라 막부]]가 각지의 영주의 군대를 규합하여 편성한 일본군과 상륙한 원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며 대치하던 와중에 하카타 인근 지역에서 정박 및 항해 중인 원나라 함대에 [[원나라의 일본원정#s-4.7|태풍이 불어닥쳤다.]] 이 태풍으로 인해 원나라 군은 많은 수의 선박을 망실하였고, 태풍이 물러간 직후 보급 능력과 전투 지속 능력을 상실했다 판단한 수군은 지상군에 통보도 하지 않고 남은 선박을 끌고 다급히 철수하였다. 지상군은 운 좋게 철수하는 선박에 탈 수 있었던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퇴각하지 못하고 일본에 남겨졌고, 모두 전투 끝에 일본군에 의해 토벌되거나 항복하여 간신히 몰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원나라의 침공에 대비해 군비를 무리하게 증강하고 휘하 영주들에게 군사적, 경제적 의무를 이행할 것을 압박하며 많은 부담을 준 막부는 영주들의 신임을 잃고 약해져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반가마쿠라 막부를 기치로 영주들이 모여 결국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고 [[무로마치 막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쿠빌라이 칸은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일본 진출도 포기하지 않고 3차 원정을 준비했으나, 쿠빌라이 칸이 숨지면서 원정 추진력이 크게 약화됐다. 결국 원이 일본에게서 명목상의 사대를 받고 정식 국교를 맺고 교역하기로 하면서 제3차 침공 계획은 백지화됐다. * [[폴란드]] 일대 공국: 1241년, 1259년 두 차례 침공에서 몽골군에게 대패한 적이 있었다. 특히 1241년의 [[레그니차 전투]]는 일반인들에게도 유럽 vs 몽골 이미지를 크게 각인시켰다. 하지만 1287년에 있었던 3차 침공 시에는 이미 폴란드 역시 헝가리처럼 석조성채와 중장기병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역으로 몽골군을 궤멸시켰다. 특히 와고프(Łagów)와 스타리송치(Stary Sącz)에서의 패전 이후 몽골군은 폴란드 침공을 포기하게 된다. * [[헝가리 왕국]]: 1241년 몽골의 1차 침공 당시 헝가리군은 [[모히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40여 년 후, 1285년 [[노가이]]의 11만 대군이 2차 침공을 거행하였으나, 헝가리 왕 [[벨러 4세]]는 이를 대비해 군제개혁을 단행하여 서유럽식 성채를 도입과 동시에 중장기병의 비중을 대폭 높였다. 덕분에 불과 3만 명으로 몽골군로부터 수성을 성공한 것을 넘어 몽골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혔고[* 대표적으로 [[투루스코 성 전투]].] [[라디슬라우스 4세]]가 이끄는 중장기병 부대는 [[탈리부가]]의 몽골기병대와 서부 [[트란실바니아]] 언덕에서 정면대결하였고, 이때 헝가리군은 중장기병의 돌격을 통하여 몽골군의 궁기병을 물리쳤다. 이 당시 몽골군의 전과는 마을 몇 개, 작은 요새 몇 개를 약탈한 것 뿐 제대로 된 공성전은 전부 실패하였고 야전에서도 [[벨라크]], [[보이스키블리스]]의 헝가리군에게 거듭 패퇴하였고 잔존병마저 현지 주민들에게 무너지게 된다.[[https://en.m.wikipedia.org/wiki/Second_Mongol_invasion_of_Hungary|몽골의 헝가리 2차 침공]] * 크로아티아 왕국: 동군연합이였던 헝가리 왕국이 1241년에 몽골의 침공으로 짓밟히고 [[자그레브]] 지역까지 침공해오자 반격했지만 자그레브 지역이 무장이 빈약했던지라 결국 대패하고 자그레브 지역은 약탈 후 파괴되었다. 하지만 1년도 안돼서 크로아티아로 도망간 밸러 4세를 잡기위해 몽골군이 다시 침입해 클리스 요새를 공략 시도했으나 1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라도 무장한 크로아티아 군에 의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벨러 4세가 다른곳에 있단 것을 안 몽골군은 [[트로기르]] 방면과 [[스플리트]] 방면으로 찢어져 공략했으나 결국 크로아티아 군에 의해 격퇴당했다.[* [[영어판 위키피디아]]중 [[https://en.m.wikipedia.org/wiki/Mongol_invasion_of_Europe|몽골의 유럽 침공]]문서에서 ''The Mongols' pursuit of Béla IV continued from Zagreb through Pannonia to Dalmatia. While in pursuit, the Mongols under the leadership of Kadan (Qadan) attacked Klis Fortress in Croatia in March 1242. Due to the strong fortifications of Klis, the Mongols dismounted and climbed over the walls using nearby cliffs. The defenders were able to inflict a number of casualties on the Mongols, which enraged the latter and caused them to fight hand to hand in the streets and gather a sizable amount of loot from houses. As soon as they learned that King Bela was elsewhere, they abandoned the attack and split off to attack Split and Trogir. The Mongols pursued Béla IV from town to town in Dalmatia, while Croatian nobility and Dalmatian towns such as Trogir and Rab helped Béla IV to escape. After being defeated by the Croatian soldiers, the Mongols retreated and Béla IV was awarded Croatian towns and nobility.'']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